맨위로가기

왜교성 전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왜교성 전투는 1598년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조선 연합군이 순천 왜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벌인 전투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과 일본군의 철수 결정 이후, 조·명 연합군은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기 위해 사로병진작전을 펼쳤다. 이 작전은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 공격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과 지휘관의 전략적 실패로 인해 실패했다. 이후 유정의 계략 실패와 연합군의 공성전, 그리고 일본군의 철수 시도와 노량 해전을 거치며 정유재란을 종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598년 일본 - 노량 해전
    노량 해전은 1598년 12월 16일 노량 해협에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 함대가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로서 일본 수군을 맞아 크게 승리한 해전으로, 일본군의 철수를 막으려는 조명 연합군과 철수를 돕고자 한 일본군의 목적이 충돌하며 발생했으며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전사했다.
  • 1598년 일본 - 제1차 울산성 전투
    1598년 1월에 벌어진 제1차 울산성 전투는 조명연합군이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던 울산왜성을 공격했으나, 일본군의 저항과 증원군으로 인해 포위를 풀고 후퇴하며 큰 피해를 입은 전략적 실패로, 임진왜란 장기화와 강화 협상에 영향을 미쳤다.
  • 1598년 한국 - 울산성 전투
    울산성 전투는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이 울산왜성을 공격한 전투로, 두 차례의 전투에서 연합군은 일본군에 패배했으며, 이는 정유재란의 전황과 동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598년 한국 - 노량 해전
    노량 해전은 1598년 12월 16일 노량 해협에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 함대가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로서 일본 수군을 맞아 크게 승리한 해전으로, 일본군의 철수를 막으려는 조명 연합군과 철수를 돕고자 한 일본군의 목적이 충돌하며 발생했으며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전사했다.
  • 순천시 (전라남도) - 선암사
    선암사는 백제 시대에 창건되어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를 거치며 번성했으나 조선 시대 불교 탄압으로 폐사되기도 했으며, 현재는 태고종 사찰로 순천 선암사 동·서 삼층석탑과 승선교 등 다수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조계종과의 분쟁 역사를 가진 곳이다.
  • 순천시 (전라남도) - KBS순천방송국
    KBS순천방송국은 전라남도 동부 지역을 가시청권으로 하는 한국방송공사 지역 방송국이며, 1976년 순천방송국으로 전환되어 디지털 TV, 라디오, DMB 방송을 송출하고 자체 TV와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작한다.
왜교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정유재란
시기1598년 9월 20일 ~ 1598년 11월 2일
장소순천왜성, 한반도 남부
결과일본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조선명나라
교전국 2일본군
지휘관 및 병력
지휘관 (조명 연합군)명나라
류정
진린
등자룡
동일원
해생
조선
권율
이순신
황세득
권준
무의공 이순신
김완
이언량
배흥립
방덕룡
류형
고득장
손문욱
이영남
나대용
이청일
우치적
송희립
지휘관 (일본군)고니시 유키나가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고토 하루마사
오무라 요시아키
오야노 다네모토
오야노 다네하카루
스모토 미치타카
병력 (조명 연합군)육군 36,000명
수군 15,000명
총병력 51,000명 (명군 13,600명, 조선군 10,000명, 수군 20,000명)
병력 (일본군)15,000명
전선 500척 (100여척)
피해 규모
조명 연합군800명 이상
일본군불명
기타일본군 전선 30척 격침, 11척 나포
관련 이미지
순천왜성 돈존
순천왜성의 돈존
왜교성 전투를 그린 정왜기공도권
왜교성 전투를 그린 정왜기공도권
일본어 명칭
명칭順天城の戦い (순천성의 전투)

2. 배경

1598년 8월 18일 후시미성(伏見城)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고부교(五奉行)와 고다이로(五大老)는 일본군의 철병을 결정하였다. 이 소식이 조선에 알려지면서 조·명 연합군은 철수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전환하였다.[9]

1598년 7월, 명나라 경략(經略) 형개(邢玠)가 한성에 도착하면서 조·명 연합군은 가토 기요마사울산왜성, 시마즈 요시히로사천왜성, 고니시 유키나가왜교성을 공격 목표로 하는 육군과 진린의 명나라 수군, 이순신의 조선 수군을 통합한 수로군을 편성하여 동시에 남진하는 전략을 수립하였다.

유정(劉綎)이 이끄는 서로군은 9월 19일 권율이광악(李光岳) 등이 이끄는 조선군을 포함, 36,000명의 병력으로 순천왜성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1598년 7월 16일 고금도에서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과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합세하였다. 7월 24일 조명 연합함대를 편성, 절이도 해전에서 승리 후 조명 연합군과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정유재란의 최후 격전을 준비하였다.

2. 1. 정유재란의 전개와 일본군의 철수 결정

1598년 8월 18일 후시미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고부교(五奉行)와 고다이로(五大老)는 일본군의 철수를 결정하였다. 이 소식이 조선에 알려지면서 조·명 연합군은 철수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변경하였다.[9]

2. 2. 조·명 연합군의 사로병진작전

1598년 7월, 명나라 경략(經略) 형개(邢玠)가 한성에 도착하면서, 조·명 연합군은 대대적인 반격 작전을 준비했다. 조·명 연합군은 육군을 세 갈래로 나누어 일본군을 공격하는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을 수립했다.[9]

구분공격 목표
동로군(東路軍)울산왜성에 주둔한 가토 기요마사
중로군(中路軍)사천왜성시마즈 요시히로
서로군(西路軍)왜교성고니시 유키나가
수로군(水路軍)진린의 명나라 수군과 이순신의 조선 수군을 통합하여 순천 왜성 공격



9월부터 일본군의 상호 구원 전략을 차단하고 남해안 일대의 일본군을 일제히 공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울산왜성에서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 사천성 전투에서의 패배, 명나라 장수 동일원(董一元)의 조급한 작전 등으로 인해 사로병진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9]

2. 3. 순천 왜성의 축조와 전략적 중요성

정유재란 초기, 일본군은 전라도 점령 계획에 따라 주요 거점들을 축조했는데, 순천 왜성은 그중 하나였다. 1597년 11월, 우키타 히데이에도도 다카토라는 순천군 광양만 안쪽 연안에 돌관 공사로 왜성을 축성하기 시작하여 12월에 완성했고,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인계했다.

순천 왜성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일본군 13,700여 명이 주둔하며 남해안 방어의 핵심 거점 역할을 했다. 일본군은 이곳에 충분한 식량과 탄약을 비축하고, 항구에 있는 500척의 배를 이용하여 철수할 계획을 세웠다.

3. 경과

1598년 음력 10월 3일,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뇌물을 받은 유정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아 이순신진린의 수군만이 단독으로 왜교성을 공격했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장도 해전에서 30여 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고 11척을 나포했으며, 일본군 3,000명을 무찔렀다.[10] 그러나 조명 연합군의 피해도 커서, 명나라 전선은 어느 정도 피해를 보았고 8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에게 포위된 명나라군을 구하러 가던 사도 첨사 황세득과 군관 이청일 등도 전사했다.[10]

3. 1. 조·명 연합군의 초기 공세와 일본군의 저항

1598년 9월, 유정이 이끄는 명나라 서로군과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이 순천 왜성을 공격하기 위해 남진했다.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과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이 연합하여 해상에서 순천 왜성을 포위, 공격했다. (장도 해전)[10] 조·명 연합군은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공격을 시도했으나,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일본군은 조총대포 등을 이용하여 연합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했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장도에서 30여 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고 11척을 나포하였으며, 일본군 3,000명을 무찔렀으나,[10] 조·명 연합군의 피해 역시 컸다. 명나라 전선은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고 8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일본군에게 포위된 명나라군을 구하러 가던 사도 첨사 황세득과 군관 이청일 등 역시 전사했다.[10]

당시 순천 왜성은 13,700~15,000명의 병력을 수용하고 식량과 탄약을 충분히 비축한, 조선에 위치한 마지막 왜군의 요새였다. 일본군은 항구에 있는 500척의 배를 이용하여 철수할 계획을 세웠다.

유정은 일본군 수급을 가져오는 중국 군인에게 금 60냥을 지급하겠다고 제안했다. 유정은 군사적 기량을 발휘하여 이동식 방패, 공성탑, 운제(雲梯, 사다리) 등 다양한 중국식 공성 무기를 동원하여 순천을 공격했다.

진린과 이순신은 상륙을 시도했지만, 일본군의 사격에 밀려났다. 10월 21일에 공격을 포기했고,[10] 육군과 해군은 10월 31일에 합동 공격을 감행했으나, 첫 번째 방어선을 넘지 못하고 세 번의 시도 끝에 공격은 중단되었다.

이처럼 조명 연합군의 초기 공세는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3. 2. 유정의 계략과 일본군의 방어

1598년 가을, 명나라·조선 연합군은 한반도 남안의 왜성들을 공략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 대규모 공세를 기획하여, 서로군과 수군이 순천을 공격 목표로 정했다. 서로군은 명나라 군 21,900명으로 유정이 지휘했고, 조선군은 5,928명으로 권율이 지휘했다. 수군은 진린이 이끄는 명 수군 19,400명, 조선 수군 7,328명은 이순신이 지휘했다.[6]

유정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유인하여 생포하기 위해 화의를 제안하는 계략을 사용했다. 9월 18일, 유정은 고니시에게 서신을 보내 다음날 순천 구성 부근에서 만나 강화 조약을 맺자고 제안하며, 직접 단기로 마중 나가겠다고 전했다. 고니시는 유정을 믿고 회견에 응하려 했으나, 마쓰라 시게노부는 당나라의 거짓과 위선을 경계하며 반대했다. 그러나 고니시는 듣지 않았다.[6]

9월 19일, 유정은 회견 장소 주변에 복병을 배치하고 가짜 인물을 내세워 고니시를 맞이했다. 고니시가 평복 차림으로 성을 나와 회견 장소로 향했으나, 복병의 공격 타이밍이 너무 빨라 계획은 실패했다.[6]

이후 조·명 연합군은 정공법으로 전환하여 공성전을 벌였다. 같은 날 오후, 지상에서 명·조선군이 순천 신성으로 진격했고, 해상에서도 명·조선 수군이 포격을 가했지만 일본군에 격퇴당했다. 20일과 21일에도 명·조선 수군이 성에 접근했으나, 일본군은 방어하여 이를 물리쳤다. 이때 명나라 유격 이금이 부상당했고, 많은 명나라 병사가 전사했다.[6]

유정은 잠시 공성을 중단하고 운제, 비루, 방차, 방패 등 공성 도구를 제작했다. 10월 2일, 공성 도구가 완성되자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총공격을 감행했다. 지상에서는 공성 도구를 연결하여 공격했지만, 일본군의 조총대포 반격에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은 성에서 출격하여 공성 도구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이날 지상에서 명·조선군은 80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격퇴당했다. 해상 공격도 격퇴되었으며, 조선 수군의 황세득이 전사하고, 주의수, 김성옥, 유형, 선의경, 송상보 등이 부상당했다.[6]

3. 3. 조·명 연합군의 공성전과 실패

1598년 가을, 명나라·조선 연합군은 한반도 남안의 왜성들을 공략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 대규모 공세를 기획했다. 이들은 동로군, 중로군, 서로군, 수군 등 4군으로 편성되어 남하를 시작했고, 이 중 서로군과 수군이 순천을 공격 목표로 정했다. 서로군은 명나라 군 21,900명(유정 지휘)과 조선군 5,928명(권율 지휘)으로 구성되었고, 수군은 진린이 이끄는 명 수군 19,400명과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7,328명으로 구성되었다.[6]

1598년 8월, 명나라 서로대장 유정은 한성을 출발하여 수원을 거쳐 전주로 내려갔다. 유정은 사자를 수군의 본영 고금도에 보내 진린에게 9월 19일을 기하여 수로를 통해 순천 신성에 대한 공격을 실시하라고 요구했다.

공성에 앞서 명·조선군은 모략을 사용하기로 하고, 화의를 칭하며 회담을 제의하여 고니시 유키나가를 생포하려 했다. 9월 18일, 유정은 고니시에게 "내일 순천 구성 부근에서 회견을 하고 강화 조약을 맺어야 한다. 이를 위해, 나는 직접 단기로 도중에 귀공을 맞이하러 가겠다."라고 전했다. 고니시는 유정을 믿고 회견에 응하려 했으나, 마쓰라 시게노부는 "당나라는 거짓과 위선이 많으니, 가면 반드시 위태롭다. 일찍이 평양에서도 속지 않았는가"라고 간언했다. 그러나 유키나가는 이를 듣지 않았다. 9월 19일, 유정은 회견 장소 주변에 복병을 배치하고 가짜 인물을 세워 고니시를 맞이했다. 고니시가 평복 차림으로 성을 나와 회견 장소로 향하려 했으나, 복병이 너무 일찍 움직이는 바람에 계획은 실패했다. 결국 정공법으로 전환하여 공성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날 오후, 지상에서 명·조선군이 순천 신성으로 진격했고, 해상에서도 명·조선 수군이 포격을 가했지만 격퇴당했다. 20일과 21일에도 명·조선 수군이 성에 접근했으나, 일본군은 방어하여 이를 물리쳤다. 이때 명나라 유격 이금이 부상당했으며, 많은 명나라 병사가 전사했다.

유정은 잠시 공성을 중단하고 운제, 비루, 방차, 방패 등의 공성 도구를 제작했다.

공성 도구가 완성되자, 10월 2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총공격을 감행했다. 지상에서는 공성 도구를 연결하여 외곽부에 공격을 가했지만, 성으로부터의 일본군의 조총대포에 의한 반격은 격렬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은 기회를 틈타 성에서 출격하여 적을 베고 공성 도구에 불을 질렀다. 이날 지상에서 명·조선군은 80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격퇴당했다. 해상 공격도 실패하여 조선 수군의 사도첨사 황세득이 전사하고, 제포만호 주의수, 사량만호 김성옥, 해남현감 유형, 진도군수 선의경, 강진현감 송상보가 부상당했다.

3일, 유정은 진린에게 "오늘 밤 수륙 합동으로 야습을 감행하라"라고 전했다. 진린은 오후 8시경 수군을 이끌고 밀물을 타고 진격하여 밤중에 성 아래에 접근하여 일본군과 공방전을 벌였다. 전투 중 갑자기 썰물이 되자, 명 수군의 당선 23척(『선조실록』,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는 사선 19척, 호선 20여 척)이 얕은 곳에 좌초되었다. 이를 일본군이 불태웠다. 명나라 병사에게 사상 및 포로가 된 자가 매우 많이 나와, 생환한 자는 140여 명에 불과했다. 조선 수군에서도 안골만호 우수가 탄환에 맞아 부상당했다. 4일에도 명·조선 수군의 공격이 지속되었으나, 성의 수비는 굳건하여 격퇴당했다.

이처럼 3일, 4일 수군은 해상 공격을 실시했지만, 유정의 육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는 2일 총공격의 손해가 컸고, 동쪽에서 사천 왜성을 공격한 중로군이 시마즈씨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10월 7일, 포위 중이던 지상군은 철수했고, 명나라는 고순천에 1만여 명을 남겨두고 유정은 부유까지 철수했다. 수군도 10월 9일, 해상 봉쇄를 풀고 완도군 고금면(고금도)로 철수했다. 명군의 퇴로에는 투기된 병량이 흩어져 있었고, 일부는 일본군이 전리품으로 입수했다. 이로써 명·조선의 서로군과 수군에 의한 순천성 공략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6]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중로군의 사천 왜성 공격과 동로군의 제2차 울산성 전투에서도 패퇴했다. 1598년 9월 말부터 10월 초에 걸쳐 실시된 명·조선 연합군의 대규모 공세는 일본군의 반격에 모두 실패로 끝났다.[6]

3. 4. 일본군의 철수 시도와 노량 해전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와 화의를 맺고 철수 준비를 마쳤으나, 이순신은 일본군의 완전 격멸을 주장하며 철수를 반대했다. 이에 진린도 이순신의 주장에 동조하여 일본군의 철수를 막았다.[1] 고니시 유키나가의 구원 요청을 받은 시마즈 요시히로 등은 수군을 이끌고 순천으로 향했다.[1] 1598년 11월 18일, 노량 해전에서 조·명 연합 수군과 일본 수군이 격돌했고,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전사했다.[1] 노량 해전의 혼란을 틈타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일본군은 순천 왜성에서 탈출하여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귀환했다.[1]

4. 결과 및 영향

순천은 13,700명에서 15,000명의 병력을 수용하고 식량과 탄약을 충분히 비축한, 조선에 위치한 마지막 왜군의 요새였다. 일본군은 항구에 있는 500척의 배를 이용하여 철수할 계획을 세웠다. 순천 공격 작전은 중국 서부군과 이순신 제독 및 명나라 동맹군 진린 제독의 해군 부대가 육상과 해상에서 합동 작전을 펼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두 제독의 관계가 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합동 함대가 장도를 확보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협력했다. 장도는 순천성에서 보이며, 일본군 장비와 물자를 보관하고 있었다. 함대는 순천을 포위하고 명나라 군대는 육지에서 공격을 준비했다. 유정은 일본군 수급을 가져오는 중국 군인에게 금 60냥을 지급하겠다고 제안했다. 유정은 군사적 기량을 발휘하여 이동식 방패, 공성탑, 운제(雲梯, 사다리) 등 다양한 중국식 공성 무기를 동원하여 순천을 공격했다. 조립하는 데 며칠이 걸린 이러한 정교한 장치들은 합동 작전의 치밀한 계획과 준비를 보여주는 증거였다.[1]

참조

[1] 간행물 朝鮮王朝実録 http://sillok.histor[...] null
[2] 간행물 朝鮮王朝実録 http://sillok.histor[...] null
[3] 간행물 朝鮮王朝実録 http://sillok.histor[...] null
[4] 서적 日本の戦史 朝鮮の役 徳間書店 1995
[5] 간행물 朝鮮王朝実録 http://sillok.histor[...] null
[6] 간행물 宣祖実録十月十二日条 http://sillok.histor[...] null
[7] 간행물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2日(甲子) 6번째기사 우의정 이덕형이 중국군의 패전에 관한 일로 치계하다 http://sillok.histor[...] 1598-10-12
[8] 간행물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2日(甲子) 7번째기사 삼로의 군사가 패전하다 http://sillok.histor[...] 1598-10-12
[9] 서적 豊臣秀吉の朝鮮侵略 吉川弘文館 1995
[10] 서적 임진왜란과 호남지방의 의병항쟁 아세아문화사 200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